선비와 산적두목(둘)
선비와 산적두목(둘)
한양에서 전라도 바닷가
궁벽한 마을로 귀양을 온 선비
귀양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한달이 넘어간다.
가지고 온 책들도 다 읽고
할일없이 마당앞을 서성인다.
보름을 갓 넘긴 밤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아무 불만없다는 듯이 떠 있고...
불쑥 지난번에 산길에서 만났던 산적두목이
마당안으로 들어온다.
산적두목 :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선비님
선비 : 아니 무슨일로 한밤중에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산적두목 :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도솔산 중턱의 미륵불 배꼽에 결서를 꺼내는 일을 상의하고 싶습니다.
선비 : 그건 꺼내서 무엇에 쓰실려고요
산적두목 : 그것만 꺼내면 소문이 퍼질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농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비 : 불심으로 세상을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산적두목 : 불심으로 세상을 바꾼다...
저희는 사람의 피로 세상을 바꿀 계획입니다.
관리의 본분을 잊고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벼슬아치들을 죽어야만
제 세상을 만날 수 있지요.
선비 :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요.
산적두목 : 실은 저도 겁이 많은 놈입니다.
뱀도 무섭지만, 고양이 눈도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선비 : 겁이 많은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다니...
말로써 이룰 수 없는 세상은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법이지요.
산적두목 :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선비 : 죄송합니다.
방안에서 책만 읽은 사람의 한계입니다.
산적두목 :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그리고 선비님이 적적해 하실까봐
몇권의 서책을 구해왔습니다.
선비 : 출처가 불분명한 책을 받는 것은 경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가지고 온 책은 염치불구하고 받겠습니다.
읽을 책이 없어 답답했던 차 입니다.
산적두목 : 그럼, 몸 성히 잘 계십시오
산적두목은 소리도 없이 담장을 넘어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때맞춰 산속의 늑대들이 무리로 소리를 질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