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산적두목(스물)
선비와 산적두목(스물)
산적두목
어느날부터인가
밤에 잠자리에 들면
바로 잠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잡생각에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
산적두목 젊었을때
태산의 주막에서 일하던 찬모를 짝사랑하였지
말도 없고
웃음도 없고
항상 수심에 찬 얼굴의 '그 여자'
무슨 연유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 여자'에 푹 빠진 산적두목
'그 여자'를 보기위해
일부러 그 주막을 자주 찾아갔었지
가끔은
천조각이며, 분가루며, 맛난 찬을 챙겨
갈때도 많았지
그럼에도
'그 여자'
자신을 본체만체했지
분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년 가까이
'그 여자'에 대한
연모를 놓을 수가 없었지
일년이 넘어가면서
산적두목 미칠 것 같아서
'그여자'에 대한 사랑을
더이상 품을 수가 없었지
놓을 수밖에 없었지
한겨울 이른 새벽에
술에 잔뜩 취해
'그 여자'를 찾아가
더 이상
추근대지 않겠다고
괴롭히지 않겠다고
무릅꿇고 고했지
그날 이후
더이상 주막을 찾아가지 않았지
앞으로는
웃음도 헤프고
말도 많고
가슴도 큰 여자에게만
마음을 주겠다고 다짐했지
그런 일이 있은 후
석달이 지난 이른 봄날
깜깜한 밤에
산적두목이 머무는 산채로
'그 여자' 홀로 찾아왔지
그날
'그 여자'
아무 말없이
산적두목과 함께
한방에서 잠을 잤지
평소 말없고
쌀쌀해 보였던 '그 여자'
그날밤
무척이나 뜨거워서
산적두목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였지
그날 새벽
'그 여자'
아무 말없이
산채를 떠났지
그날부터
사방으로 '그 여자'를 찾기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산적두목
'그 여자'를 결코 찾을 수 없었지
10여년이 지난 오늘밤
산적두목
'그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생각나지않지
심지어는
너무 뜨거워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그날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몇일전 꿈에서 꾸었던 장면이거나
산적두목 자신이 일부러
꾸며놓은 상상속의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들에
걱정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