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요한님과 낭만방랑자님의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서울역사박물관내의 "가리봉 오거리전"을 보고 왔어요.
지난 겨울에는 아는 형과 함께 이곳에서 "프라하전"을 보았는데...
이렇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볼 만한 기획전시를
많이 하는 것 같았어요.
그것도 무료로...
구로공단, 가리봉오거리...
이제는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어
조금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에도 이 곳에서 근무를 하셨던 많은 분들에게는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든지간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구로공단, 가리봉오거리, 가리봉시장으로 남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명이 단순한 지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세월의 빠른 흐름과 함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요.
구로공단이 구로 디지털단지로 바뀌고...
지방에서 올라온 공장 노동자에서
중국에서 오신 중국 동포들로
그 주인이 바뀌는 구로공단, 가리봉오거리
솔직히 우리가 이 만큼 살 수 있었던 것은
첫번째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고 정주영 명예회장님의 탁월한 지도력과 추진력
두번째는 공장에 들어온
많은 어린 여공들이
낮은 월급, 긴 노동시간, 인간적인 모욕에 성착취까지...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이를 악물고 버텨 나갔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사회가,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
제가 이 전시회에 온 첫번째 이유는
수출의 역군이라는 자부심보다는
가족을 위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조건 살아 버텨야했던
그 당시 공장 노동자들
그들에게 뒤늦게나마 제 나름대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이 곳에 찾아오게 되었어요.
애국가를 부른 후에야만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여공들을 산업의 역군, 수출의 주역이라 치켜세웠지,
보통 때에는 공순이, 공돌이라고 깔보고 얕잡아 보던 사람들
그런 치사하고 아니꼬운 사람들 밑에서도
열심히 일을 해야만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던 어려운 시절들
여공의 삶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런 장면들이 많이 떠올라졌어요.
지금도 공돌이, 공순이라는 인식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여공들의 힘겨운 삶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걱정도 함께 들었습니다.
세상이 디지털로 바뀌어도
누군가는 땅속에 들어가 철을 캐야하고
누군가는 기판위에 콘덴서나 저항을 납땜해 붙여야하고
누군가는 화장실 변기를 깨끗이 닦아야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디지털이라고 모든 것이 디지털이 돼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나 로봇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회도 결코 아닌데...
오래간만에 보는 비키니 옷장
이런 방의 모습에서도 그 당시 그들의 어려웠던 삶들이 그려지네요.
그렇죠.
어린 나이에 지방에서 보따리 짐을 매고 서울로 상경하는 일
그들이 비록 공장에 취직하여 컨베이어 벨트앞에 서서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함에도
그들은 상경이죠.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젊은이들...
문득 그 모습 자체가 웬지 처량해 보여도
그 당시 그들에게는 삶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제가 너무 어둡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경숙님의 "외딴방"
저는 이곳 전시를 둘러보면서
신경숙님의 소설과 함께
양귀자님의 "원미동 사람들"
박노해님의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이 많이 떠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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