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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님의 "설야산책(雪夜散策)"

자작나무1 2011. 9. 18. 13:25

노천명의 수필 "설야산책(雪夜散策)"

 

 

 

저녁을 먹고나니 퍼뜩퍼뜩 눈발이 날린다. 나는 갑자기 나가고 싶은 유혹에 끌린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쓰고 기어이 나서고야 만다.

나는 이 밤에 뉘 집을 찾고 싶지는 않다. 어느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눈을 맞으며 한없이 걷는 것이 오직 내게 필요한 휴식일 것 같다. 끝없이 이렇게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싶다. 눈이 내리는 밤은 성찬을 받는 밤이다. 눈이 이제 대지를 희게 덮었고 내 신바닥이 땅위에 잠깐 미끄럽다. 숱한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고 내가 또한 그들을 지나치건만, 내 어언 일로 저 시베리아의 눈 오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으랴. 가로등이 휘날리는 눈을 찬란하게 반사시킬때마다 나는 목도리를 더욱

눌러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느끼면서도 발길은 좀체 집을 향하지 않는다.

기차 바퀴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지금쯤 어디로 향하는 차일까. 우울한 찻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속에 앉았을 형형색색의 인생들, 기쁨을 안고 가는 자와 슬픔을

받고 가는 자를 한자리에 태워 가지고 이 밤을 뚫고 달리는 열차. 바로 지난해 정월 어떤 날 저녁 의외의 전보를 받고 떠났던 일이 내 가슴에 새기게 한 일이 생각나며 밤차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진다.

이따금 눈송이가 빰을 때린다. 이렇게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내 마음 속에 사라지지 못할 슬픔과 무서운 고독이 몸부리쳐 견디에내지못할 지경인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뉘 집인가 불이 환히 켜진 창 안에서 다듬이 소리가 새어나온다.

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정이 여기도 흐르고 있음을 본다. 고운 정을 베풀려고 옷을 다듬는 여인이 있고, 이 밤에 딱딱이를 치며 순경을 돌아주는 이가 있는 한 나도 아름다

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머리에 눈을 허옇게 쓴 채 고단한 나그네처럼 나는 조용히 집문을 두드린다. 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

하다. 꽃 한송이없는 방안에 내가 그림자같이 들어옴이 상장처럼 슬프구나.

창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 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 적막한 거리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들이 흰 눈으로 덮혀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눕는다. 회색과

분홍색으로 된 천정을 격해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깍고 나는 가슴을 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