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방어진에서 울산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를 빙빙 돌아다녀야만 했다.
돌아다니다가 지쳐 눈에 띄는 택시를 타고 태화강에서 가까운 모텔로 왔다.
엊그제 늦게까지 TV를 보다가 자서 어제 하루 종일 피곤했는데,
어제 저녁에는 그런 피곤함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 목욕을 하고나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영국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의 승전보에 대한 궁금증을 꾹 누르고...
새벽 5시
이미 밖은 환하게 밝아 있다.
서둘러 베낭을 둘러메고 모텔을 빠져 나온다.
오늘은 좀 더 일찍 움직여서 좀 더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올라갈 생각이다.
사실 1박2일은 제대로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일정이다.
오고가는 시간 빼고, 첫날에는 그나마 조금 여유가 있지만,
여행 마지막날이자 둘쨋날은 시간도 짧고, 마음도 급해진다.
모텔을 빠져나와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을 따라 십리대밭으로 아침산책을 한다.
아직 이른 시간이고, 옆에 강이 있어서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이미 태화강 대공원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산책을 즐기시거나 운동을 하고 계신다.
나도 그들 틈에 끼여 앞으로 걸어 나가고...
지난 2월달에 강릉 송정에서의 아침산책 이후 처음 이렇게 아침산책을 즐기는 것 같다.
여행이란...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앞으로 십리대밭이 나타난다.
우선 푸른 대밭이 나를 반겨준다.
나도 울산에 여러번 왔지만,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강 옆에 넓은 대나무숲이 있어서 그렇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책에선가 울산의 십리대밭에 대한 사진과 글을 읽고나서야 이런 멋진 곳을 왜 그냥 지나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대숲...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고,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몸도 마음도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다.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대숲 사이로 난 길을 지나다니시고...
그런 틈틈이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서 웬지 모를 흐뭇함에 빠진다...
대숲을 빠져나와 깔끔하게 지어진 정자, 만회정에 이른다.
텅빈 정자마루에 올라서 지나온 길들도 더듬어 보고, 울울창창한 대나무숲도 바라보고, 묵묵히 흐르는 태화강도 굽어본다.
이런 전경 때문에 이곳에 정자가 세워진 것 같다.
마루에 앉아 주변 경관도 살펴보고, 물도 마시고 한참을 쉰 후에 대밭을 빠져 나온다.
도로로 올라서 공업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전에 울산에 왔을 때 공업탑로타리는 버스로 여러 곳을 가기 위한 중요한 버스정류장이었다.
언양을 거쳐 석남사로, 방어진으로, 양산의 통도사로, 부산 노포동 터미널로 가기 위한...
버스정류장에서 방학 중임에도 학교를 나가는 학생들과 회사로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린다.
공업탑 로타리가 번화가이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임에도 버스는 쉽게 나타나지 않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버스가 다가온다.
공업탑 로타리에서 내려 우선 뒷골목으로 들어가 돼지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몸도 가볍고, 가뿐하다.
어젯밤에 잠도 푹 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침산책을 했기 때문인가 보다.
식당을 나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울산의 버스정류장에는 앞으로 올 버스들의 번호와 시간들이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10여분인가를 기다려 간절곶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이번 버스에는 진하해수욕장으로 놀러가는 학생들이 많이도 버스에 탄다.
내가 바닷가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점 중의 하나는
서울이나 내 고향 춘천의 학생들에 비해 울산이나 부산의 학생들은 좀 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이나 춘천처럼 내륙도시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주말이나 여름방학 때 주로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울산이나 부산처럼 바닷가 도시의 학생들은 바닷가에 나갈 수 있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전에 부산에 있을 때, 기말고사를 마치고 과자와 음료수를 사가지고 해운대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서 둥그렇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는 모습들은
마치 한국이 아닌, 이국의 학생들을 보는 것처럼 마냥 신기하고 부러웠다.
내가 고등학교 학생일 때에는 오후에 시간이 나면, 춘천의 명동을 돌아다니다가 닭갈비를 먹는 것으로,
아니면, 공지천에 나가 강바람을 쐬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다와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내륙의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복이 조금은 더 많은 것 같다.
나를 태운 버스는 울산시의 외곽으로 해서 울주군으로 넘어가고,
옹기마을로 유명한 온양읍을 지나 바닷가를 향해 달려나간다.
온양읍의 들판...
조그만 산들에 둘러쌓인 논
창 밖에 펼쳐지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논들이 자꾸 내 마음을 당긴다.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포근해 보이고, 푸른색과 노란색의 논들이 정말 보기 좋다.
외졌다면, 외졌다고 할 수 있는 이곳에 이런 예쁜 논들이 있다니...
생각 같아서는 버스에서 내려 이곳의 풍경들을 사진에 담고 싶다.
계절의 순환과 농부님들의 노동이 함께하는 큰 판...
버스는 온양들판을 지나고 서생포 왜성과 진하 해수욕장을 지나고
고개를 넘어 내가 가고자하는 간절곶에 도착한다.
뜨거운 햇빛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길 옆의 노송숲이 눈길을 당긴다.
간절곶 등대를 둘러보고, 바닷가로 내려선다.
이곳에서도 커다란 우체통이 우뚝 서 있다.
우체통과 바다...
서로 이질적이라면 얼마든지 이질적인 두가지가 사이좋게 어울려 있다.
누군가에서 소식을 전하고 받기 위해 필요한 우체통
답답한 마음을 달랠 수 있고, 바다로 나아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바다
이런식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고,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다는 바다와 우체통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다로 내려간다.
넓게 펼쳐진 바다와 여기저기서 불어오는 바람.
바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옆의 등대에도 가보고
진하 해수욕장으로 가기 위하여 바닷길을 따라 나선다.
계속해서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길 위로 MBC 드라마 "욕망의 불꽃" 드라마 세트장이 나타난다.
이국적으로 세워진 건물이 퍽 특이하다.
예뻐 보이기도 하고...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건물이 너무 멋져 보여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
세트장 안에는 레스토랑이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 앞에서 바라만본다.
지지난 여름에 우리 가족들은 삼척과 울진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 때 울진 죽변항 언덕 위에 세워진 SBS 드라마 "폭풍속으로" 세트장이 떠올라졌다.
언덕의 비좁은 공간에 예쁘게 세워진 집 한 채... 그 뒤로 절벽이 있고, 그 밑으로 성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가 있고...
드라마 세트장을 보고 긴 도로를 올라 국도변 버스정류장에 선다.
진하해수욕장까지 바닷길이 이어져 있으면 걸어갈 생각이었으나 길이 끊겨 도로 위로 올라선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시골버스는 올 생각을 안 하고...
기다리다 지칠 때 쯤 택시 한 대가 달려오고...
달리는 택시를 붙잡고 진하 해수욕장으로 간다.
진하해수욕장에 도착.
아침에 버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리더니만, 해수욕장에는 생각보다 그리 사람들이 많지 않다.
날도 덥고, 오늘 따라 파도가 높아서 그런 것 같다.
파도가 높은 만큼 바람은 세게 불어오고 있다.
진하해수욕장은 앞의 명선도와 명선교가 일품이다.
아마 이 두가지가 없었다면 정말 무미건조한 해수욕장이 되었을 것 같다.
해수욕장을 지나고, 명선교 다리 위로 올라선다.
앞으로는 좀전에 지나친 진하 해수욕장 전경이 펼쳐지고.
뒤로는 뒤로 물러선 산들을 배경으로 강이 바다로 흘러들고.
강 안에는 조그만 고깃배들이 정박해있다.
특별히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그저그런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뭔가 평화스러우면서도 나의 마음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 같은 풍경...
바다에 와서 고즈넉한 강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다리를 내려와 가까운 횟집에 들어가 매운탕을 먹고,
옆의 배 모양의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냉커피를 마신다.
둥그런 창으로는 좀전의 보았던 평화스러운 풍경이 펼쳐지고...
어디선가 스피커를 통해 느린 피아노 반주에 맞춰 색소폰이 흐느끼고...
그와 함께 오후의 시간이 느릿하게 흘려가고 있다.
여행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는 좀전의 명선교에서 보았던 강 하구의 풍경과
찻집에서 느꼈던 오후의 시간들이 문득문득 생각날 것 같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찻집에서의 내 느낌과는 달리 시간은 빠르게 내달리고...
찻집을 나와 명선교를 건너고 다시 버스정류장에 선다.
이제 마지막으로 통도사를 가기 위해 서두른다.
울산시내로 나아가는 버스에 올라타고, 공업탑 로타리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통도사로 향한다.
통도사행 버스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언양 읍내를 거쳐 신평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지금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어서고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시간이 오후 7시
좀 빡빡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데까지 갔다가 오후 5시 20분쯤 후에 도로 내려와야지 맘을 먹는다.
통도사가 워낙 큰 절이라 한두시간으로 다 둘러볼 수 없다.
입구까지만 걸어보고 되돌아와야겠다.
시간에 쫓겨 부지런히 걷고...
걸으면서 하루 더 이곳에 묵을까 생각해본다.
그러자면 여러 절차가 복잡할 것 같아...
우선 부모님께 허락을 다시 받아야 하는데... 우리 부모님이 흔쾌히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고...
괜한 오해만 살 것 같아 그런 생각을 접는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끝에 통도사 일주문 앞에 도착하고...
제멋대로 자라는 소나무길을 따라 걷는다.
이곳은 항상 그늘이 져 있어 한낮의 열기 속에서도 그리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아니 편애하는 길 중의 하나가 통도사로 들어가는 이 길이다.
이 길 때문에 통도사를 좋아하는 것이고,
오늘처럼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굳이 통도사로 온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키 큰 소나무들이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면서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길.
이 길에 들어서면 우선 '청산에 살리라'라는 우리의 가곡이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이 봄도 산 어리엔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나는 이 길을 주로 아침 일찍 걸었는데, 가끔 혼자서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나처럼 어느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콧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갔다.
그냥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상쾌해지고,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길...
굳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무숲이 주는 푸르름과 상쾌함, 자연스러움이 한데 어울리는 길
그런 것들을 사진에 담기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부지런히 길 따라 올라간다.
행복한 길 끝에는 통도사라는 불법종찰이 있고,
절 옆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냇가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리 물은 많지 않았지만, 나무들로 인해 그늘이 져 있고, 뒤로 산바람이 불어와 참 좋은 피서지일 것 같다.
절 안으로 들어서고...
오래된 목재 건축물과 잘 정돈된 나무들... 지붕 위로는 영축산의 울퉁불퉁한 능선이 가까이 다가와 보인다.
많은 전각들로 다소 혼잡하거나 산만한 분위기도 없지는 않지만,
오래되어 빛이 바랜 나무들의 색감과 잘 가꾸어진 나무들, 거기다 일정한 빈 공간들이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줄여주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사진 찍고, 쉬고... 그랬을텐데...
서울로 가는 기차시간에 맞추기 위해 다시 되돌아선다.
아쉽지만, 무척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나중에는 통도사에서 몇일을 머무르면서 통도사 뿐만 아니라
비로암, 극락암, 축서암 등등의 산내암자들을 두루 돌아다녀야겠다.
미리 정했던 5시 20분이 훌딱 지나가고...
신평버스터미널을 향해 걸어온 길을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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