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융건릉을 한바퀴 돌고 나오면서 떠오른 생각 하나.
왜 영정조시대에는 세종대왕이후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정조이후의 조선의 역사는 왜 급격히 쇠퇴했을까 하는 의문.
예전부터 조선후기의 역사를 책이나 TV로 보면서 그런 의문들이 자주 들었어요.
오늘 이곳에 머물면서 제 나름대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첫째 정조의 개혁이 기득권층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않고 정조와 소수의 신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정조이후에 그 개혁정책들을 강력히 밀고나갈 추진세력들이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조와 개혁적인 신하들... 정약용을 중심으로한 실학파들...
그런 소수의 사람들을 주축으로 개혁을 시도하다보니, 정조이후 그런 개혁을 밀고나갈 세력들의 힘이 갑자기 약해진것이지요.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 정약용이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연대기가 아니라 정조나 정약용의 개혁정책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슴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두번째는 개혁반대세력... 그 당시 몇몇 세도정치집단의 반발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개혁이란 그들세력의 힘을 빼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정조의 승하이후 개혁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어요.
세번째는 외부세력... 청이나 일본 더 나아가 러시아나 미국등 제국주의세력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것 같아요.
소중화라는 사상에 빠져 내부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다른 나라들의 움직임에 둔했고, 그들 나라들의 야욕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점도
정조시대의 개혁과 문화적 영화가 한순간에 무너진 이유라고 봐요.
그 이후 대원군의 개혁정책도 정조시대처럼 똑같은 이유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보여요.
정조시대의 개혁과 그 한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논의속에서 개혁정책이 추진되어야 했는데,
대원군 자신의 욕심으로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는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격동의 조선후기... 우리역사의 아픈 점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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