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찾아서 184

공지영님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 중에서

"어제 H씨에게 질문할 거 뽑으려고 하다가 선배랑 내가 인터뷰한 글을 다시 보았지. 선배가 그랬더라구. 죽고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운명에 대한 대결같은 거. 그것은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한번 껴안아보려는 그런 대결이었는데, 말하자면 풍랑을 당한 배가 그 풍랑을 이기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풍랑을 타고 넘어가는 것같은 그런 종류의 대결...... 내게 이것을 가르쳐 준 것은 글이었는데 글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넘치다가 엎질러져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엎질러져 나온 글들은 상처처럼 빨간 속살에서 터져나온 석류알처럼 우리를 기르고 구원하니까요, 했더라구" 소설 제목에 쓰인 '글목'이란 말은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작가가 지어낸 것임

유홍준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 - 인생도처유상수" 중에서

경복궁의 중요한 특징이자 자금성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위치 설정에 있다. 자금성은 건축 디자인의 기본취지가 위압감을 주는 장대함의 과시에 있다. 이에 반해, 경복궁은 우리나라 건축의 중요한 특징인 주변환경, 즉 자연과의 어울림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 건국자들이 이 위치를 찾아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는지 모른다. 건축 미학 자체가 다른 것이다. 주변의 경관을 자신의 경관으로 끌어안는 차경의 미학을 경복궁처럼 훌룡히 이루어낸 건축은 세계에서 드물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5 -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 중에서

소나무는 한민족의 심성과 가장 잘 들어맞는 나무다. 동물에서 소가 그렇다면 식물에선 단연코 소나무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진경산수를 창출하는데 성공한 것의 반은 바로 저 조선소나무를 표현하는데 있었다. 소나무는 그 생명력에서부터 우..

황순원님의 "내 고향 사람들" 중에서

눈을 창 밖으로 주었다. 저물어가는 남산이 마주 바라다 보였다. 산 밑까지 불규칙한 고저를 이루며 잇닿아 있는 흑갈색 지붕들과 거기 밋밋이 솟아있는 검푸른 산봉우리, 그리고 그 위에 아직 저녁빛이 남아있는 잿빛 하늘, 이것들이 어떠한 순서와 어떠한 모양으로 어둠에 묻혀 버리는가를 바라보았다. 먼저 흑갈색 지붕들이 차차 고저를 잃고 어둠 속에 깔려 버리면서 전등불들이 대신 어떤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한 뒤에도 산봉우리는 흑암색으로 어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편에 서서히, 그러나 어느덧 제 빛깔을 흑암색으로 변해 가지고 이 산봉우리를 품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간신히 하늘과 접촉된 어느 선에다 바깥 풍경에 정신을 주고 있는 동안, 이상스럽게도 초조하던 마음이 적이 누그러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