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희망버스 행사가 있어서 겸사겸사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떠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왔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담배도 피우고, 서서 TV도 보면서 기차시간을 기다린다. 서서히 기차시간이 가까워지고...
9시 30분에 출발하는 부산행 Ktx에 오른다. 보통 어디를 갈 때에는 무궁화호 기차를 이용하는데, 이번에는 짧은 기간 동안 좀 더 많은 것들을 보기 위해 Ktx를 탔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고... 느긋이 앉아 의자 앞에 비치되어 있는 레일로드라는 잡지도 읽어보고, 가지고 간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도 읽으면서
부산으로 내려간다.
내가 여행을 좋아해서 그런지 여행이나 답사기 그런 책들을 좋아한다. 특히 김훈님의 자전거 여행과 유홍준 교수님의 답사기는 읽고 또 읽고 그런다.
이번 답사기6도 재미있게 읽힌다. 가끔씩 나의 생각과 딱 맞는 부분에서는 그래, 그렇지 맞장구도 치면서 쉽게 읽힌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 거창과
합천, 달성 도동서원에 언젠가는 이 책을 가지고 가봐야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뜬다. 나는 천상 떠돌이꾼의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 정오 못미쳐 부산역에 도착한다. 부산은 내가 참 많이 온 곳이다. 한 때는 한달 동안 부산에 있었던 적도 있었고...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유원지같은 들뜬 분위기나 바가지 요금이 없어 서울이나 일반 도시처럼 생활의, 일상의 공간같은 도시로 느껴지고, 그러면서도 어느 여행지 못지 않게 돌아다닐만한 곳
들이 많다. 이번에 갈 해운대와 태종대, 송도해수욕장 거기에다 을숙도, 다대포, 민주공원, 초읍 어린이공원, 광안리, 송정, 기장 등 바다를 끼고 멋진 곳이 참 많다.
또한 부산은 좋은 산들도 많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부터, 장산, 백양산, 엄광산, 승학산, 봉래산, 금련산 등등... 그런 산에 올라가면 바다와 함께 부산이라는 도시가
멋지게 보인다. 그런 광경들이 참 보기 좋다. 산과 바다와 도시가 잘 어울리는 도시... 그리고 자주 봐서 익숙해진 풍경들... 그래서 2년에 한번씩은 꼭 온다.
내가 이제까지 돌아다녀 본 많은 곳 중에서 특히 부산은 생활의 공간으로서의 도시이자, 여행지로서의 도시로 함께 느껴진다. 또한 어디든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돌아다닐 수 있어 더 좋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일단 담배 두대를 피우고,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해운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니는 여행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려진다. 기차를 기다리고, 버스를 기다리고... 그런 기다림 속에 여행이 이루어지고... 해운대 해수욕장을 거쳐 기장으로 가는 1003번 좌석버스가 도착하고...
버스에는 사람들이 만원이다. 오늘과 내일 부산에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행사들이 참 많아서 그런가 보다. 부산영화제, 바다미술제, 행복나눔행사... 거기다 희망버스 행사
까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린 것 같다. 차도에는 차도 엄청 많다. 버스 안에서 어떤 할아버지께서는 해운대로 가는 길이 이 길 하나 뿐이어서 더더욱 길이
막힌다고 하셨다. 그렇게 더디게, 더디게 버스는 해운대 해수욕장 버스정류장에 서고, 내려서 택시를 타고 달맞이고개로 올라간다. 부산에는 참 멋지고 좋은 곳이 많은데,
나는 특히 해운대 달맞이고개와 용두산, 송도해수욕장이 좋다. 달맞이고개에서는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시원한 눈맛이 있고, 용두산공원은 조금만 올라가면
부산시내와 바다가 넓게 보여서 좋고, 송도해수욕장은 바다치고는 호수같이 아늑하고 편안해서 좋다.
우선 12시가 넘어 한시 가까이 되어 뭘 먼저 먹고 돌아다녀야겠다. 가까운 곳에 서울깍두기라는 식당이 보여 안으로 들어가 곰탕을 시킨다. 나는 여기 달맞이공원에 자주
올라왔는데, 올 때마다 달맞이고개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지 여행 첫날부터 컵라면을 먹으면서 가난하게 여행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 제대로 된
식당에 들어가 곰탕을 시킨 것이다. 곰탕을 먹으면서 예전에 먹었던 전남 나주 하얀집의 곰탕과 대구 달성의 현풍할매곰탕이 생각났다. 특별히 곰탕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지로 떠돌아다니면서 두둑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어서 가끔씩 먹는다. 먹고나서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사고, 그 옆의 카페 "Angel in-us coffee"에 들어
가 시원한 냉커피를 마신다. 배 부르고 이렇게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니, 여행을 하고 있다는 기쁜 생각이 밀물처럼 나에게 밀려온다.
이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해월정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날씨가 약간 연무가 끼고, 맑지 않아 바다가 신통치 않다. 이곳에 오면서 내심 대마도까지 볼 생각이었는
데...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곳에 와 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정자를 내려와 숲길을 따라 내려온다. 가로수길이 이어지고... 길 옆으로 벚꽃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벚꽃이 한창일 때 오면 참 멋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내려온다. 왼쪽, 바다 쪽으로는 울창한 나무숲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이런 모습
때문에 달맞이고개를 좋아하나보다. 가끔 시야가 트이면서 바다가 넓게 보이고... 밑으로는 해운대 해수욕장과 동백섬... 그 옆의 초고층 빌딩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련하게 광안대교가 보인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조금만 높이 올라가도 이렇게 멋진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래서 부산을 좋아할 수 밖에 없고...
고갯길이 끝나고 철로를 지나자 바다가 왈칵 내 앞으로 붙어선다. 미포라는 표지석이 기다리고... 왼쪽 유람선 타는 곳을 지나 미포에 간다. 아주 조그만 항구이다.
조그만 방파제 뒤로 역시 조그만 배들이 몰려있고... 그 옆으로 빨간 등대가 있다. 그러나 이 곳은 해운대해수욕장같이 탁 트인 풍경이 아니라 어느 시골의 조그만 포구,
한편으로는 분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적한 그런 풍경을 이루고 있다. 다만 방파제 너머 해운대 모래사장과 호텔들이 보여 그런 한적한 분위기는 많이 약해지지만...
미포를 빠져나와 본격적인 해운대 해수욕장길이다. 해운대 해수욕장... 넓게 탁트인 바다와 백사장 그 옆으로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크고 높은 현대식 호텔들이 서
있다. 한쪽에는 갈매기들이 떼지어 몰려있고... 내가 다시 바다에 와 있슴을 실감한다. 길을 따라 걷는다. 오늘은 도보여행이다.
해수욕장 입구에는 두사람이 앉아서, 한 사람은 기타를 치고, 한 사람은 색소폰을 부르고 있다. 주위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고... 그들의 악기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
지고 있었다. Stan Getz와 Joao Gilberto의 "The Girl From Ipanema"를 연주하고 있었다. 기타소리는 색소폰소리에 묻혀 잘 안 들렸지만,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서 한참동안 서서 구경을 했다. 예전에도 가끔씩 저녁 때 해운대에 오면 호텔의 야외 풀밭에서 음악회가 열리곤 했다. 근처 의자에 앉아서 연주해주는 음악을 들으
면서 남 몰래 흐뭇해하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음악은 바다와 함께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입구쪽의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한여름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또 한쪽에서는 부산영화제 홍보부스와 작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어 더더욱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 많은 곳을 피해 걷고 또 걷는다. 행사장 주변을 벗어나자 풀밭 위에 노래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서 있다. 우리시대 가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조용필님의
노래비이다. 서서 노래비를 보면서 나도 따라서 속으로 노래를 불러본다. 이 노래는 나에게는 별로이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니 반가운 느낌도 든다. 이런 것이 노래의
힘인가...
잠시 해운대 해수욕장을 벗어나 포장마차 뒷길에서 자판기에서 뽑은 콜라에 담배 두대를 피운다. 언제부터인가 해운대 해수욕장 전 구역이 금연구역이 되었다. 하긴
요즘은 공원은 웬만해서는 다 금연구역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금연구역을 벗어나 담배를 피운다. 멀리까지, 이런 좋은 곳에 와서 법을 어길 수 없으니까...
다시 걷기 시작한다. 부산 웨스턴조선호텔 앞이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해운대 해수욕장과 뒤로 달맞이고개까지 잘 보인다. 날씨가 조금 맑고, 역광이 비
추지 않았다면, 멋진 사진을 나올텐데... 그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동백섬 입구... 달맞이고개길과 해운대 해수욕장길... 이젠 동백공원 산책길이다... 이 길들이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길이라고 생각해본다.
입구 바다 방향으로 황후인어상이 보인다. 인어상을 잘 볼 수 있도록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고... 갑자기 웬 외국인이 다가와 사진기를 내민다. 나는 얼른 사진기를 받아서 그 외국인을 인어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 그가 다시 손으로 하나를 표시하고, 나는 그에 따라 다시 한번 사진을 찍어준다. 이 모든 과정이 짧은 시간에 아무 얘기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바위 위에 산책로와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 위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있고... 키 큰 소나무와 동백나무도 종종 보인다. 이 길은 그냥 아름다운
길일 뿐만 아니라, 명품 산책로이다. 이런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는 나는 마냥 행복하고 기쁘다.
이번에는 최치원 선생님이 바위에 새겼다는 해운대 석각이 보인다. 시간이 오래 되어서 글자 한 자는 아예 안 보인다...
최치원... 통일신라시대 학자... 어린 나이에 혼자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유학생, 당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얻고, 토황소격문이라는 명문을 지었던 관리, 어느 날 모든 것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대학자, 고국에서도 높은 지위를 얻고, 불교에 심취하여 많은 비문을 썼던 불교도,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던 방랑객,
나중에는 신선이 되었다는 도인... 최치원 선생님의 갖가지 모습들이 연거푸 생각이 떠오른다.
도로로 올라오자 코 앞에 등대가 보인다. 등대와 건너편의 앞으로 가까워진 광안대교를 사진을 찍고...
이번에는 APEC 누리마루 하우스가 나온다. 지난번 열렸던 APEC 주회의장이다. 누리는 세계라는 말의 순우리말이고, 마루는 정상이라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건물도 특이하게 잘 지었지만, 그 옆의 쭉쭉 뻗은 나무들이 더 멋있게 보인다. 회의장이 개방되어 있어 들어가서 여기저기 구경한다. 정상들이 먹었다는 한 끼 식사메뉴와
고노무현 대통령님의 사진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회의장을 빠져 나오자 또 다시 멋진 나무들이 반긴다. 남도답게 활엽수림들이 보기 좋게 자라고 있었다. 팔손이라는 나무도 눈길이 가고...
이젠 서서히 도보길이 끝나가고 있다. 큰 길을 건너자 이제는 송림숲길이다. 방풍림으로 심어진 소나무숲이나 보다.
솔숲을 벗어나 큰 길을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부산역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집회시간에 늦지 않게 갈려고 부지런히 걸어서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기다리던 부산대학병원으로 가는1003번 좌석버스가 들어오고... 이번 버스도 만원이다. 뒷쪽 좌석에는 외국인들이 앉아 있었다. 좀 전에 보았지만, 여기 해운대 해수욕장
에는 외국인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의 특징 아닌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비록 추석을 지난 본격적인 가을이었지만,
날씨가 따뜻하여 계절에 아랑 곳 없이 그런 옷차림을 하였나 보다. 예전에 내가 고등학생일 때 우리 고등학교는 미군부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래서 미군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미군들은 한겨울에도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반바지 차림에 하이킹을 즐겼고, 조금 넓은 빈터에 빙 둘러 앉아서 팝음악을 시끄럽게 틀여놓고 춤추고, 술먹고,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인생을 즐기는 모습들... 고등학생일 때 보았던 미군의 모습은 그런 모습들이었다.
버스는 막히는 길을 가다서다 하면서 부산역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얼추 집회시간이 다가왔다. 역 앞 광장에서는 희망버스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그들을 피해
건너편 좁은 인도와 뒷골목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전경들이 가득 메우고... 일단 가까운 김밥천국에 들어가 김밥 두줄을 먹고,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남포동으로 옮겨간다. 남포동에는 부산영화제 일환으로 이런저런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포동 시내 한편의 넓은 도로에 무대를 만들고 행사가
시작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행사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사람들이 밀려온다.
희망버스...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에서 일어났던 정리해고와 그에 반대하여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님을 연대하기 위한 행사이다.
사실 자본주의가... 가진 자의 탐욕에 의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더욱 커지고, 시도때도 없이 행해지는 정리해고와 늘어만 나는 비정규직, 수시로 일어나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그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만 하는 노동자, 서민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모이지 않으면, 연대하지 않으면... 비인간적인, 야만의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행사는 계속 이어지고, 한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점점 더 피곤해진다. 추워지고, 허기도 지고... 더 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어 일어나 남포동 버스정류장에 가서
송도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희망버스 때문에 부산에 내려온 것인데, 몸이 받쳐주지가 않아서, 이렇게 중간에 빠지는 내가 씁쓸하다. 30번 버스를 타고 송
도에 내려 가까운 여관에 들어가 대충 씼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감기가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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