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전남 장성군 백암산 산행기...

자작나무1 2011. 10. 7. 21:10

 어제(10. 1)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 세시에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백양사역에 내려왔다.

 

 어제 묵은 모텔에서 나와 일단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백반을 시켜 먹었다. 전라도이지만, 예상처럼 백반은 맛이 그저 그랬다. 대충 아침을 때우고 근처의 삼거리 버스

터미널로 갔다. 표를 끊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는 제 시간에 들어오고, 버스를 타고 백암산으로 간다. 버스는 고개를 넘고 넓게 펼쳐진 장성호를 옆에 끼고 달린다. 요즘 가뭄이 극심해서 그런지 호수에는 거의

물이 말랐다. 물이 마른 호수는 보기가 허전해 보였다. 호수를 지나 조그만 마을들이 연이어 나타난다.우리나라 농촌의 어렵고 힘든 상황들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떠올라

졌다. 어딘지 퇴색하고 허물어져가는 듯한 건물들이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버스는 어느새 버스종점에 도착하고... 버스에 내려 산 쪽을 올려다보니,

백암산 백학봉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길 따라 올라간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도 적고, 무엇보다도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일주문을 지나고 양옆으로 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전통찻집 "풍경소리"가 나타난다. 빨간색 지붕의 파라솔과 그 앞의 개가 마음을 당긴다. 파라솔에

앉아서 냉커피를 마신다.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냉커피를 마시면서 잠을 쫓는다. 찻집을 나와 다시 절로 가는 길을 오른다. 그 사이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길 옆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갈참나무(수령700년)가 길 한쪽을 지키고 있다.

조금 지나자 조그만 호수가 나타나고, 그 뒤로 멀찍이 쌍계루가 나타난다. 백양사를 나타내는 얼굴 같은 모습이다. 주위가 단풍으로 물들었다면 환상적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단풍들 때 오고 싶었으나, 일정 잡기가 쉽지도 않고 이렇게 사흘을 쉬는 연휴 기간도 만나기 힘들 것 같아 아쉽지만 미리 왔다.

그래도 백학봉의 빼어난 암봉을 본 것만으로 우선은 기쁘다. 그 만큼 백학봉은 백암산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쌍계루를 지나고 조금 지나자 백양사가 나타난다.

절 옆에는 이 뭣고라는 이상한 이름의 탑이 먼저 반긴다. 스님들이 화두로 '이 뭣고'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절 앞에서 약수를 마시고, 빈병에도 약수를 받는다.

천왕문을 바라본다. 나도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몇일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절의 규모에 비해 천왕문이 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왕문이 전에 만들어지고,

뒤의 전각들이 나중에 지어져서 그런가... 그런 생각도 들고, 아까 보았던 일주문이 높고 컷는데, 그것에 비하면 절 입구의 천왕문이 아무리 생각해도 작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작아서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작은 문이 작아서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천왕문을 지나 여기저기 절 구경을 한다. 대웅전과 그 뒤로 백학봉의 암봉이 멋지게 다가선다. 멀찍이 물러나서 사진도 찍고, 이 암봉이 있어서 대웅전의 위치가 여기에

있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 돌아다니다보니, 고불매(수령 350년)가 눈에 띈다. 나중에 봄에 와서 매화꽃을, 그것도 오래된 나무의 매화꽃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지난 여름에 갔었던 순천의 선암사 선암매도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매화 나무의 매화꽃을 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특별히 매화꽃을 좋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륜이 있는, 그것도 당당히 제 이름을 가진 매화 나무의 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이겠는가.

한참을 절 구경을 하고, 절을 나와 산길을 걷는다. 그런데 절 뒤의 산길이 시멘트 포장길이다. 아니 이럴수가... 이런 좋은 절의 길을 시멘트로 포장하다니... 잠시

씁쓸한 감정을 뒤로한 채 묵묵히 산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등산이라는 말보다는 입산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등산이라는 말에는 웬지 모를 인간들의 자만심이

곁들어 있는 것 같고, 입산이라는 말에는 나를 낮추고 자연을 높이는 그런 겸손함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조금 올라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한편은 운문암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길이고, 다른 한편은 약사암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 길은 다행히 비포장, 아니 그냥 산길이다.

그 길은 가파른 산사면에 지그재그로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밑에서 보니, 예전에 보았던 MBC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의 길이 생각났다. 약사암에서 일부러 절을 찾

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밋밋한 시멘트 포장 도로보다는 휠씬 낫다. 이런 것도 자연 파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그 지그재그의 길 옆으로는 흙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나무로 담을 쌓아 놓았다. 천천히 지그재그의 길을 따라 올라간다. 올라갈수록 숨이 차고 힘들

어진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잠바를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가다가 쉬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그러면서 다 올라가니, 약사암이 나타난다.

약사암은 백학봉 절벽 밑에 암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암자 보다는 그 뒤의 절벽이 더 먼저 눈길이 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암자 앞의 전망대로 가니, 시원한 전망이 펼

쳐지고 있었다. 산 아래로는 아까 지나왔던 백양사의 지붕들이 모두 보이고, 그 뒤로 산 넘어 산이 연거푸 보인다. 정말 장관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힘겹게 산을 오르고,

또 오르나 보다. 나도 전망대 옆의 나무의자에 앉아 한참을 내려다본다.

약사암을 지나 돌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가니 이번에는 영천굴이 나타난다. 굴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본 절이 크다보니, 이렇게 암자며, 굴까지 갖추어져 있는 것

같다.

영천굴을 지나자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조금 오르자 나무계단길이 이어지고... 오늘은 그리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편인데, 오르막에서는 맥을 못춘다.

계단길에서도 조금 오르고 쉬고 또 조금 오르고 쉬고... 몸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계단길 중간중간 의자를 마련해 놓아 쉬었다 가기에는 참 좋다.

이런 경사로에 계단을 놓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이런 계단길이 있어 나같은 사람은 쉬면서 올라가겠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산에 이렇게 힘들게 계단을

놓아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든다. 산 초입의 시멘트 길도 그렇지만, 산길이 가파르다고 안전시설을 설치하는 것보다는 아예 출입통제를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산에 안전시설을 설치하여 누구나 산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만, 반대로 자연의, 산의 입장에서는 험한 길은 출입통제를 하여 산을 산

으로서 남겨놓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도 있고... 예전에 영암의 월출산을 천황사지에서부터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 길

도 온통 바위투성이라 안전시설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그런 산이었다. 나중에 내려와서 영암 읍내에서 다시 쳐다보니, 바위로만 이루어진 월출산 같은 바위산은

오르기보다는 밑에서 올려다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암(영험스러운 산)이고, 월출산(보름달과 함께 보는 산)이다. 어쩌면 산을 좋아

하는 산꾼들은 이런 얘기에 이의를 제기하겠지만...

하여튼 계속해서 연이어진 계단길이 끝나고 약간의 바위길을 지나자 백학봉 651m에 도착한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괜시리 땀을 많이 흘렀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에 괜히 뿌듯함 그런 것을 느낀다. 백학봉 바위 위에 앉아서 장성의 논과 밭, 마을, 강 등을 내려다보면서 사과를 먹는다. 이렇게 정상에서 아래

를 내려다 볼려고 산에 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앉아서 땀도 식히고 호흡도 고르고 그러니까 어느새 조금씩 한기가 몰려와 다시 일어나 배낭을 짊어지고 산

길을 나선다.

이젠 그리 큰 오르막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뒤로 한 채... 양옆으로 조릿대길이 이어진다. 그리 큰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비단길... 서서히 몸이 풀리기 시작하고...

쉼 없이 길을 이어가고... 한번 크게 내려갔다 올라서니, 백양산의 정상인 상왕봉 741m이다. 앞으로는 들판과 마을이 더 넓게 보이고...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온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비록 단풍은 보지 못했어도, 산은 멋진 산이라는 생각이다. 백학봉의 절벽이며, 중간의 조릿대길이며, 정상

에서의 전망이며... 굳이 단풍까지 바라지 않아도 좋다는 느낌이다.

상왕봉을 내려오니 삼거리이다. 잠시 망설여진다. 앞의 사자봉을 갈까말까 망설여진다. 여행 중에, 또는 산행 중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힘들어서, 시간이 없어서,

비용 때문에 가지 않았던 무수히 많은 길과 여행지들... 나중에는 곱으로 후회를 안겨 주었던... 지난 날의 경험을 생각해서 조금 힘들어도 오르기로 결정했다. 거리도

0.4Km이고,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이 길은 돌계단길인데, 폭이 좁아 조심하면서 오른다. 작년 가을에 정읍의 내장산을 간 기억이 떠오른다. 산은 물론 멋있었지만,

올라가는 길은 무척 안 좋았다. 가파른 경사길에 사모래길 아니면 돌계단길... 올라가거나 내려올 때 매우 조심스러워했으며, 힘이 배가 들었다. 그 길에 비해 여기

백암산의 등산로는 누군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 써서 다듬은 듯이 길이 좋다. 돌이 깔린 구간에서도 작은 돌들은 치우고, 대신 넓적한 돌들로 채워놔 걷기가 편했다.

또 암봉 때문에 경사가 심한 구간에서는 계단을 만들어 주고... 그래서 지난번 내장산보다는 힘이 덜든 것 같다. 그 만큼 시간도 단축되고... 산의 입장에서는 반대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오르니 사자봉 722m이다.

이곳은 나무들에 둘러쌓여 전망이 없다. 잠시 앉았다가 다시 계단길을 내려선다. 더욱 조심하면서... 원래 산길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넘어지기 쉬우니까...

내가 발목과 다리가 보통 사람들보다 약해서 산을 오를 때는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서 오를 수 있지만, 내려올 때는 시간이 보통 사람들보다 배 이상 걸린다. 그러면서 넘어지기도 잘 하고... 이런 높은 산에서는 내려올 때 꼭 한 번씩은 넘어지곤 한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앞으로 운문암이라는 큰 절이 보인다.

다시 삼거리에 도착하고... 이젠 하산길이다. 예의 그 계단길을 조심조심 내려오기 시작한다. 내림길도 만만치 않아 한참을 내려와도 계속 내리막길이다. 산의 높이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또 한참을 내려오니, 운문암의 대문이 보인다. 옆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단 채... 좀 더 내려오니 이내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난다. 산길을 걷다가

시멘트나 콘크리트의 포장길을 걸을려면 시간도 더 걸리고 더욱 피곤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산에 온 이상 산의 길에 무조건 맹종할 수 밖에... 그래야만

그 길을 따라 내려올 수 있으니까... 대개 다른 산에서는 이렇게 포장길이 나타나면 금방 하산이 끝나는데...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듯이 이 길은 조금 다르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계곡에 물이라도 많았으면 탁족이라도 하고 갈텐데, 여기도 물이 없다. 그저 묵묵히 걸어 내려올 수 밖에...

드디어 백양사가 나타나고, 쌍계루를 지나고 일주문을 지나 산행을 마치기 시작한다. 산에 왔으면, 산을 즐기면서 천천히 내려와도 되는데, 오늘은 산에서 먹은 것이

점심으로 사과 하나 먹고,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서 조금은 급한 마음으로 내려왔다. 식당 상가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허기가 몰려와 우선 아무 식당에 들어가 된장찌개를 먹었다. 원래 이런 산이나 절에 오면 비빔밥을 먹는데, 오늘은 웬지 다른 것을, 아니 그냥 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밥을 배불리 먹고 건너편의 상점 앞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신다.

나에게 있어 이런 시간이 가장은 아니고, 행복한 시간이다. 산에 갔다오고, 밥 배불리 먹고, 커피 한 잔에 담배 두 대를 피우면서 느긋하게 앉아있는 시간...

이런 잔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다.

인생 뭐 있어... 이 정도면 됐지... 그런 어이 없는 생각 속에서...

다시 일어나 버스종점으로 걸어간다. 버스종점에는 아무도 없다. 휑한 바람만이 어디선가 불어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