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來不似春
2020년 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봄이 왔슴에도 봄같지 않음
코로나19 때문에 온 나라가, 아니 온 세상이 꽁꽁 얼었다.
양성 판정, 확진자, 자가격리, 입원과 죽음
불안한 상황에서 찾아온 봄
그럼에도 그 봄을 느낄 수 없다.
아니, 그런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버렸다.
어제 저녁에 술을 많이 마셔서 오늘 아침에는 늦게 일어났다.
씻고, 내 동생이 만들어준 모닝빵을 먹고, 사진기를 챙겨 집을 나온다.
신도림역에서 전철을 타고 선릉역으로 온다.
전철 안에도 승객들이 많지 않다.
선릉역에서 선정릉 앞으로 온다.
선정릉 앞 카페 Ronnefeldt에 들어가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오늘 아침의 일들을 공책에 적는다.
아침의 일들을 다 적고, 백석시집을 읽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
카페를 나와 선릉과 정릉으로 간다.
서울 선릉과 정릉 사적 제199호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세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고,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1494년(성종25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선릉이
조성되었고, 1530년(중종25년) 정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동원이
강릉 형태로 능이 조성되었다.
중종의 정릉은 원래 1545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양 서삼릉 안에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과 함께 조성되어 정릉으로 고쳤다가,
1562년(명종17년) 중종의 정릉을 이곳으로 옮겨와 현재이 이르고 있다.
선릉과 정릉의 원찰은 봉은사이며,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의 동북쪽
약 1km 거리에 있다. 선릉과 정릉은 1970년대 강남이 급격히 개발되었
음에도 잘 보전되어 도심 속에서 푸른 녹지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왕릉이다.
동원이강릉 :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각 능을 조성한 형태
입장료 천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간다.
조금 쌀쌀한 날씨
코로나19 여파에도 사람들이 좀 있다.
대부분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산책을 하신다.
선정릉은 이렇게 강남의 공원이자 산책로이다.
이런 공원이 강남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역사의 힘, 아니 조선 왕조의 힘
제사를 치르기 위한 재실, 한옥 건물
이곳에는 사람들이 없어 조용하다.
재실 주변에는 봄이라고 노란 산수유가, 히어리가 피어 있다.
봄은 노랑이다.
재실 옆의 500년된 커다란 은행나무
산책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주변의 소나무숲
노란 빛의 버드나무
도시 속의 시골, 인공 속의 자연 공간이다.
홍살문, 정자각, 언덕 위의 왕릉
질서정연한 모습
원칙을 중시하던 조선의 모습
선릉 옆에는 키 큰 진달래에 붉은 꽃이 피어 있다.
정순왕후의 능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 정릉으로 간다.
주변에 높은 빌딩이 보임에도 능 안이 넓어 갑갑하지 않다.
편안한 휴식공간
몇년전 겨울에도 이곳에 왔었다.
정릉을 보고, 선정릉을 빠져나온다.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허얼빈 가정식에서 계란토마토볶음덮밥을 사먹고,
코엑스 방향으로 걷는데,
약국 앞에 긴 줄이 서 있어, 그 줄 맨끝에 서서 마스크를 산다.
마스크 대란
마스크가 이렇게 귀한지 처음 알았다.
솔직히 밖에서 하루 종일 마스크를 씌고 있어서 답답하다, 갑갑하다.
답답한 봄, 갑갑한 봄
약국을 나와 골목길을 걷다가 ARISTA COFFEE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팝송이 흘러나오는 카페
커피를 마시면서 공책에 여행기를 이어쓴다.
카페를 나와 도로를 건너 코엑스 지하로 간다.
별마당 도서관
책들이 높은 천정까지 빽빽이 채워져 있는 곳
그게 장관인 곳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도서관을 내 사진기에 담는다.
사진을 찍으면서, 책들은 많은데, 그에 비해 책을 볼 수 있는 좌석은 적다는 생각이 든다.
또 높은 곳의 책들은 어떻게 꺼내지 그런 생각도 든다.
실속 없는 도서관
어쩌면 강남의 문화가, 아니 우리의 문화가 겉으로는 화려하면서도,
그 내실은 알차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별마당 도서관을 나와 코엑스 마당을 지나 봉은사로 간다.
봉은사
봉은사는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인 신라시대 794년
(원성왕10년)에 연화국사가 견성사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인 선릉을 위하여
능의 동편에 있던 이 절을 원찰로 삼고 절 이름을 봉은사로 개칭했다.
이후 명종이 즉위하여 왕의 모후인 문정대비가 섭정하였을 때
대비는 고승 보우를 중용하며 불교를 중흥하였는데,
이 때부터 봉은사는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선종의 수사찰이 되었으며, 승과가 부활되어 이 절 앞의 너른
벌판에서는 스님들의 과거 시험인 승시가 열렸던 것이다.
"전국 유명사찰 순례기, 명찰" 중에서... p.238
어제 향기님의 블로그에서 봉은사에 홍매가 핀 것을 보고,
봉은사에 오게 되었다.
도로를 건너고 공사 중인 절 앞을 지나 봉은사 안으로 들어간다.
법왕루 밑으로 해서 들어간다.
중앙의 탑
그 위의 오색 연등들
그 모습에 내 마음마저 환해진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연신 사진을 찍는다.
그 옆의 한옥 한채
한옥 앞의 소나무 한그루, 홍매 한그루
홍매에는 붉은 꽃이 피여 있다.
반가움
한옥 찻집을 지나 판전으로 간다.
봉은사 판전 현판
이 현판은 조선 후기 문인서화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것이다.
1856년(철종7년)에 영기 스님이 새긴 <화엄경수소연의초>등의 경판을
봉은사에 안치하기 위해 법당을 지었다. 이 현판의 크기는 세로 77cm,
가로 181cm이다.
김정희는 1852년(철종3년)에 북청의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에 머물렸다. 그곳에서 봉은사를 왕래하다가 1856년 10월 10일에
별세하였다.
이 현판은 그가 별세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전해진다. 이 현판의 글씨는
어리숙하면서도 굳센 필체를 드러낸다. 특히 '전'자의 왼삐침을 곧게 내려
누른 점이 돋보인다. 말미에 '七十一果炳中作{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이라고 낙관하였다. '果'자는 김정희가 과천에 머물던 때의 별호인
果老 果翁을 의미한다.
꾸밈이 없는 졸박한 글씨에 김정희 말년의 청정무구한 심상을 엿볼 수
있다. 대웅전에 걸린 현판도 김정희가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글씨
난 판전이라는 글씨보다는 七十一果炳中作이라는 글씨를 유심히 본다.
당대 최고의 천재 추사 선생님
명성과 함께 콧대도 높았던 추사의 노년
플라톤도 나이가 들면 허수아비가 된다는 말보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더 먼저 떠올라졌다.
자신을 낮춰 세상의 스승이 되신 추사 선생님
한참을 판전 앞에서 그 글씨를 보고 또 본다.
봉은사의 봄
어떤 건물 옆에는 붉은 홍매와 노란 산수유가 피어 있다.
꽃 아래 많은 진사님들
봄꽃 촬영명소
난 지붕 위에 드리워진 산수유를 사진 찍고 싶어했는데,
그런 구도가 나오지 않는다.
봉은사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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