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류시화님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중에서

자작나무1 2011. 10. 20. 20:16

여행자를 위한 서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밑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 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