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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님의 "그날의 손님을 위하여"

자작나무1 2012. 8. 14. 19:14

 당신은 8월에 뜻하지 않은 손님처럼 왔었다. 그게 여름이었으니까 손님이 아니라 소낙비처럼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혹은 이제는 다 핀 줄로만 알았던 그 덩굴에 갑자기 피어난 능소화라 할 것인가.

 그날 사람들은 당신이 나의 조국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멀리멀리 떠나 있다가 왜 이제서야 돌아왔는가. 8월의 손님... 당신한테서는 땀냄새와 무슨 좀약같은 것. 여름 장마에 장농을 열면 풍겨나오던 그런 냄새가 났다. 아 그것은 어머니의 냄새였다. 외가집에 갔다 저녁 늦게야 돌아오신 어머니가 가난한 봇짐을 풀 때 풍겨나오던 그런 냄새였다. 늘 우리를 실망시켰던 그 남루한 보따리처럼 당신의 짐 속에서 나온 것도 소매가 맞지 않는 낡은 옷이거나 금시 먹을 수 없는 떫은 감, 딱딱한 옥수수 같은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을때 당신은 슬픈 눈으로 내려다 보면서 무엇인가 말하려다 말고 헛기침만 했다. 자기를 몰라 본다고 아주 화가 나 있는 것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당신이 아주 지쳐 있고 또 지금 먼길을 오느라 노자도 다 떨어져 우리에게 과자 한봉지 사올 수 없는 처지라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왠지 서먹해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당신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아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다리를 주물러 드릴까요>라고 말하면서 당신의 몸을 만졌을 때 우리는 당신의 몸이 종잇장처럼 말라 있었고 온 몸에는 핏자국과 병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신의 몸을 만진 후부터 당신은 벌써 손님이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울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당신은 그날 우리에게 그렇게 왔었고 우리는 당신을 그렇게 맞이했었다.

 이제 사십년, 그렇게 와서 사십년인데도 당신의 몸은 야윈 채로 있고 멍든 자리는 아직도 푸른빛이 가시질 않았다.

 당신이 빈 봇짐을 들고 았다고 누가 푸대접을 했던가. 당신이 말하지 않는다 해서 누가 당신의 속마음을 몰라주었던가. 당신은 손님처럼 왔지만 한번도 이곳에서는 손님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당신은 능소화가 마흔 번이나 피고 질 때까지 이렇게 먼 곳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가.

 오늘 우리는 또다시 당신의 손을 잡는다. 우리가 만났던 최초의 그날처럼 <다리를 주물러 드릴까요>라고 인사를 하겠다. 이번에는 사양하지 말고 다리를 쭉 뻗고 당신은 먼 길을 걸어온 궃은 기억들을 다 털어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치가도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인 까닭이다. 시는 당신의 베개가 되고 부드러운 이불이 되어 당신이 오래만에 코를 골고 잘 수 있는 편한 잠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다.

 마치 어머니들이 자장가를 불러 우리를 이 험한 밤 속에서 편히 잠들게한 것처럼 시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잠재우기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훈장을 줄 수도 없고 당신이 쉬는 곳에 높은 담을 쌓아줄 수 없어도 당신이 걸어온 먼 길의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줄 수는 있다. 그래서 세계를 잠재울 수가 있다.

 8월의 손님이었던 당신... 이제 당신은 손님이 아니라 시인의 육체요, 그 영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